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.
하지만 그는 조선을 비하하지 않았다.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.
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.그 수출 대금으로 근대화의 밑거름을 마련했다.백범 김구의 비판 들려오는 듯 백범 김구는 ‘나의 소원(1947)에서 이렇게 말했다.
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.이어지는 그의 일침은 뼈아프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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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.레닌·스탈린의 뒤를 추종했던 북한의 현실이 같은 불운을 떠안고 있다.
인문학과 휴머니즘의 단절과 붕괴가 그렇게 중대한 역사적 변화를 초래할 줄 몰랐다.소련이 해체되면서 문예부흥이 가능해지기를 바랐다.
대학에 진학해서는 톨스토이를 떠나 도스토옙스키의 철학과 인간 문제.영·독·불 문학보다 러시아 문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.